본문 바로가기

정명석 목사는

그 길은 생명구원의 발길이었다 [나만이 걸어온 그 길 #5]

글 : 정명석

 

사람들은 누구든지 저마다 길을 각자 걸어오고 걸어간다. 
나도 나만이 걸어온 내 인생길이 있다. 그것들을 돌이켜 보면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의 하늘 인생을 살기 위함이었던 것이 마음 깊이 절실하게 깨달아진다. 

내 인생의 고통과 고뇌들은 모두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보기 위함이었으니 한 날의 괴로움은 오늘 이 날의 기쁨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영웅열사들이 그러했고 노아, 엘리야, 모세, 요셉 등 성서의 중심인물들도 하늘을 만나기 전에는 각자 자기만이 겪는 눈물겨운 길들이 있었다. 

나 또한 내 인생에 있어 파란곡절이 많았다. 
가정에서 나를 이해하기까지는 거의 30여년이 걸린 것 같다. 그 오랜 기간은 하늘이 숨겨 그렇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가정의 무지로 나의 고통과 시련이 더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선지자라 할지라도 가정과 고향에서 인정하지 않음으로 그 받는 고통이 심하다’고 말씀하셨다. 보통 사람과 같은 삶과 생활을 원했던 가족들에겐 남다른 나의 기도 생활이 모두 이해되지 못하는 행실과 말들이었으니 나의 말과 행동은 주목을 받게 되고 미친 자 취급의 대상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더 뛰면 더 받게 되고 씨를 더 뿌린 자가 더 거두게 된다. 더 깊이 연구하고 더 깊은 삶을 사는 자는 그렇지 못한 자와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당연히 서로 심정이 안 맞는 상대가 되는 것이다.

나 또한 하늘의 심정과 진리를 더 깨닫고 사망의 잠에서 보다 깨어났으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 내 맘에 들리가 만무했다. 사망으로 흘러가는 젊은 인생들을 육적으로 보면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깊은 산 속에 묻혀 1주일, 2주일 혹은 한 달씩 기도하노라면 사망의 세계에서 무가치하게 살아가는 그들 영혼들을 보면 견딜 수 없는 쓰라림과 불쌍함이 파도쳐 밀려왔다. 
그럴 때는 농사보다도, 학문에 파고드는 것보다도, 벼슬을 하겠다는 마음보다도 그 영혼들을 건지고 싶어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럴 때마다 다리골의 그 숲속 기도굴을 헤치고 나와 1500~2000장씩의 전도지를 싸 짊어지고 전도 길을 떠났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발길이었으며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행실이었다.


당시 농촌은 하루 벌어 열흘을 먹는다는 바쁜 계절이었다. 집에는 늙으신 부모님이 새벽부터 밭에 나가면 별을 보고서야 돌아오셨다. 그렇게 살아도 시골 된장찌개에 세술밥을 먹고 살기에 급급한 월명동 내 고향 달동네 삶이었다.

그러나 나의 길은 가정의 부모와 전혀 달랐다. 그 길은 하늘이 시킨 것도 땅이 시킨 것도 아닌 내가 깨닫고 불타는 마음으로 스스로 마음 내키어 떠나는 생명 구원의 발길이었다.
인생 그 누구든지 알고 보면 자기의 삶에 부모가 동참하지 못하고 형제도 애인도 동참하지 못하는 것이다. 형제도 애인도 결국 깊이 보면 각자의 삶이다. 자기의 고통에 남이 참예하지 못한다. 자기 길은 자기가 가야 된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자기 품속에 넣고 살려고 하고, 손 위 사람이 손 아래 사람을 자기 손 안에 쥐고 살려고 한다. 그것은 실상 그 인생을 죽이는 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생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다르게 준 삶의 길이다. 그것은 천국을 간다해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개성의 삶이다. 그래야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분복을 찾아 살 수가 있다. 

내가 부모 형제가 시키는 대로 내 인생길을 걸어 왔더라면 오늘날 이 길을 전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깊이 기도하고 깨닫는 가운데 하늘이 감동을 주는 대로 살아온 삶이 오늘의 삶이었다. 

부모님이나 형제와 깊은 대화를 진지하게 한 후에 나의 길을 물었을 때 부모님은 
“형제들은 도시로 목회하러 나가고 동생들은 돈 벌러 나갔으니 너는 결혼해서 농사 지으며 살아라.” 
하셨다. 형들에게도 내가 무엇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되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을 주지 못하였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약한 네가 무엇을 할 자격이 있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 하늘은 나에게 무언의 답을 주었다.
부모는 낳아주고 학교의 선생은 학문을 가르쳐 주고 스승은 인생을 가르쳐 주지만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전부가 되어 내 갈 길을 옆에서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 
하늘의 감동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에서 가족들이 투덜대고 온 마을 사람들도 “월명동 아무개는 이 바쁜데 미쳤다.” 하며 소리가 높아졌으니 말이다. 

나는 전도지를 가지고 한 번 나가면 가까운데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떠돌아다니며 차안에서나 노상에서나 할 것 없이 복음을 전하였다. 

 


한날은 젊은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많이 타는 대전발 진산 경유 대둔산행 버스에 올라서 15~20분씩 복음을 전했다. 그 때 전한 말씀은 예수 믿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이었다. 믿어야 맘도 몸도 편하고 내세에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을 전하며, 또 하나님은 나를 통해 지금 이 시간에도 각자의 생명을 부르시고 지극히 사랑하신다고 깨우쳐 주었다. 

차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며 좋아했고 하늘이 심정 측은히 여긴다는 말씀에 마음이 감동되어 달게 받아 들였다. 

개중에는 교회를 잘다니다 안 다니는 자, 혹은 교회를 다니다가 ‘하나님이 나 같은 자도 정말 필요로 하시나…’ 하고 다니다 만 자, 혹은 하나님을 꼭 믿어야 되는지 의심하는 자도 있었지만 말씀을 전하니 모두 감동과 감화를 받아 더 말씀해 달라고 하기도 했다. 정말 하나님은 전도자를 통해 말씀해 주고 계셨던 것이다. 성령님은 감동을 주었고, 주는 그들을 사랑해 주셨다. 

나는 날이 갈수록 복음 전함에 담대해졌으며 어눌한 말은 유능해졌다. 그래서 좁은 차 안에서 보다는 광장에서 외쳐주고 싶었고, 또 온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떤 말을 하여야 되나 하며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럽고 당황도 되었지만 막상 말씀만 하면 입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렇게 해가 지도록 외치고 버스가 끊어지면 나는 발길을 돌려 다시 다리골 기도굴로 갔다. 온 종일 밭에 나가 일하고 들어온 부모님이 있는 집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에게 편안한 작은 문도 없었고 불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으며 박쥐까지 살고 있었던 다리골 기도굴이었다.

특별히 먹은 밥은 없었어도 관광 온 학생들이 몇 개 준 사과를 먹고 쓰린 속을 달랬다. 그리고 하루의 일과를 영과 육으로 반성해 보면서 다음날의 계획도 세웠다. ‘내일도 오늘처럼 재미를 봤던 그 곳으로 가야지! 내일은 방법을 달리해서 관광 온 사람과 진산에서 대둔산까지 같이 걸어가며 전도를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다. 보람이 느껴졌다. 그렇게 하며 밤새 기도하고 성경을 보다보면 어느새 팔 베개 새우잠에 가을밤은 나도 모르게 깊어만 갔다. 

그 때 내 나이 27세. 나만이 걸어온 길이었다.